자신이 유명해짐에 따라 조강지처 즉, 젊을 때부터 빈고를 나누고 함께 늙은 아내를 버리고 새 파트너와의 삶을 다시 시작할 연예인은 부지기수다.그것이 보도될 때마다 세간에는 비판이 쏟아지지만 조강지처와 헤어지는 것은 그들이 마냥 매정하거나 감투를 쓰기 때문일까.
여기에서는 저명인사의 이별 배경에 있는 사정, 진심을 읽어낸 호소다 마사시씨의 저서 「뮤지션은 왜 조강지처를 버리는가?」에서 GLAY의 TERU의 이혼극을 인용, 소개한다.
인디 시절부터 계속 응원해 온 아내
한 살 연하라는 첫 번째 아내는 원래 인디 시절 GLAY 팬이었다.
그녀와는 데뷔(94년)하기 3년 전에 알게 됐어요.저희가 하코다테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도쿄에 나와서, 아직 손님이 10명밖에 되지 않는 환경에서 라이브를 하고 있었을 무렵부터 보러 와 주었던 사람입니다. (중략)데뷔전에는 일과 밴드활동의 양립에도 몹시 불안했고, 좌절할 뻔했던 적도 있었습니다.그녀는 그럴 때 항상 가까이 있고 지지해 주었다.(FRIDAY 1997년 4월 4일호)
〈TERU군은 당시부터, 사귀고 있던 연인과 함께 살고 있던 것 같다.두 사람의 생활 때문에 힘든 허드렛가게 일을 계속했고 밴드 활동도 하고 있었다.
(중략)
나는 이 때, 처음으로 TERU군의 연인의 존재를 알았다.그리고 그녀에 대해서,
"과연 TERU군을 좋아할 만한 여성이야"
라고 감탄했다.( 「내 안의 GLAY」시미즈 유키 저/코어 하우스 간)
1993년, TERU는 그 여자와 결혼.이듬해 첫아이를 낳고 있다.메이저 데뷔전이라고는 하지만, 요즘은 라이브하우스에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GLAY이지만,
얘 때문에 더 팔고 싶다.돈을 더 벌고 싶다.
라고, 이 시기의 TERU가 그렇게 맹세했으리라는 것은 용이하게 짐작이 간다.그것은 그뿐 아니라 자복 시절에 처자를 둔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결의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 그 결의에 응하듯 갑자기 운이 트이는 것이 재미있다.
96년에 3집 첫밀리언
결혼한 것과 같은 해인 1993년, X JAPAN 요시키의 눈에 띄어, GLAY는 요시키가 설립한 엑스터시 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는다.다음해 그 산하의 레이블, 플래티넘 레코드의 소속 제일호 아티스트로서 요시키 프로듀싱 「RAIN」로 메이저 데뷔를 완수한다.여기서부터 GLAY의 음악 활동은 순조롭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2nd 싱글 「한여름의 문」을 릴리스.첫 전국 투어도 성공.3rd싱글 「그녀의"Modern…"」을 릴리스. 이 작품으로부터, 일찌기 BO?WY나 THE BLUE HEARTS를 다룬 음악 프로듀서, 사쿠마 마사히데와의 공동제작이 스타트한다.연말에 3대도시 투어를 성공. 사쿠마의 GLAY평은, 그들의 장래를 훌륭하게 암시하고 있다.
GLAY는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지극히 평범한 밴드입니다.해나가면서 새로운 일이나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일들에 도전하고 있다.하고 싶은 것을 굽히면서까지 팔릴 생각을 하지는 않잖아요.컴퓨터적인 곡보다, 소박하고 싱싱한 것이 요구되고 있는 요즘 시대에, 그들의 음악이나 스타일이 딱 맞았을 뿐( 「GLAY Perfect File 완전 백서」Team GLAY 편/치하야서방 간)
단숨에 국민적 밴드까지 올라가다
1995년, 1집 앨범 「SPEED POP」을 발매해, 오리콘 8위에 랭크 인.그 다음에, 6th 싱글 「Yes, Summerdays」가 「카멜리아 다이아몬드」의 CM타이업곡이 된다.이 시기만 되면, 라이브의 티켓은 플라티나화하고 있다.
그리고 운명의 1996년을 맞는다.
「빅토리아」의 CM타이업곡이 된 8th 싱글 「글로리아스」가 오리콘 4위.2집 「BEATout!」가 싱글, 앨범 통틀어 첫 오리콘 1위를 기록.드라마 주제가가 된 9th 싱글 「BELOVED」가 오리콘 3위, 83만매의 대히트.GLAY는 일약 인기 밴드의 반열에 오른다.
게다가 그 기세는 멈출 줄 모른다.'aboy~계속 잊지 않아~'가 오리콘 2위.3집 'BELOVED'가 오리콘 1위를 기록한데다 무려 152만장을 팔아 싱글, 앨범을 통틀어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인기 밴드는커녕 단숨에 국민 밴드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미야모토 코지가 말하는 당시의 GLAY
당시의 그들이 어떻게 보여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엘리펀트 카시마시의 보컬, 미야모토 코지에 의한 귀중한 증언이 있다.
NHK 팝잼 프로그램에 GLAY와 함께 출연했어요.나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만, 그들은 그런 것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중략) 그 아우라니, 자신감이라던가, 풍격이군. 나는 팔리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발돋움하고 악착같이 왔지만 GLAY는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힘껏 하고 그걸 인정받아 엄청나게 팔린다는 그런 자신감과 자신감이 나오는 것 같았다.(주간문춘)2000년 4월 27일호 『아가와 사와코의 이 사람이 보고 싶다』)
단기간의 대브레이크가, TERU의 결혼을 기회로 시작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TERU의 아내가 행운의 여신이 되었다고 보이지도 않는다.
요즘 밑바닥 시절을 떠받치던 그가 어떤 심정으로 있었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다.하지만 상상할 수 있지도 않다.
그를 받쳐 주길 잘했다.정말 따라오길 잘했다.
만나 밥벌이로 살아온 남편을 음으로 양으로 뒷바라지하던 부인에게 대성공을 거둔 모습은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아이까지 안고 있었던 것이다.기쁨이 한층 더할 것이다.
이것으로 더는 생활불안에 시달릴 일은 없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이러한 생각도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변해가는 불안
"성공한 건 기쁘지만, 그가 멀리 떠나버릴 것 같아."
실제로 성공을 거둔 성공자는 그 생활이 뒤바뀌는 것은 물론 교유관계에도 변화가 생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지금까지의 친구와는 다른 멤버가 늘어, 옷차림이나 말투, 또, 취미, 기호까지도 바뀌어 간다.
말을 거꾸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내가 볼 때는 그것은 우주어일 뿐이다.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초밥을 시스라 해 보거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내 안의 GLAY 시미즈 유키 지음/코어 하우스 간)
라고 하는, 인디 시대의 GLAY를 지지했던 스탭의 증언에도 있듯이, 어쩌면, 아내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변화하는 교유관계 속에는 당연히 여성의 존재도 포함된다.외모, 지위, 교양, 이런 갖춰진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유형의 여성들만 나타난다.많은 성공자들이 가정을 돌보지 않을 만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96년이라는 해는, GLAY 만이 아닌 또 하나의 아티스트에게 있어서도 운명의 해가 되었다.바로 PUFFY다.
오오누키 아미와의 불륜, 그리고 이혼과 재혼
오오누키 아미, 요시무라 유미의 여성 듀오로 이루어진 PUFFY는 1996년, 오쿠다 민생 프로듀스의 데뷔 싱글 「아시아의 순진」(작사 이노우에 요스이·작곡 오쿠다 민생)이 갑자기 매상 106만매의 밀리언 히트.2nd 싱글 「이것이 내가 사는 길」은 한층 더 그것을 넘는 161만매를 기록, 다음 해 봄의 센바츠 고교 야구의 입장 행진곡으로 선택되는 등, 일약 일본의 음악 씬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아무로 나미에, 하나하라 토모미, globe, hitomi 등 코무로 패밀리가 항상 히트 차트에 이름을 올리던 96년의 음악업계에서 GLAY와 PUFFY는 비소실파지만 밀리언 히트를 연발하는 희소한 존재였다.
어디까지나, 음악 업계에 있어서의 나란히 서는 이 관계가, 실생활에서도 그렇게 될 줄은, 이 시점에서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덧붙여서, GLAY와 PUFFY의 첫 공동 출연은, 1996년 8월 31일 방송의 「팝 잼」(NHK)에서, GLAY는 히트 차트 1위의 「BELOVED」를, PUFFY는 1 st앨범 「amiyumi」수록의 「특기 때문이다」를 부르고 있다.
두 번째 공동 출연은 다음 해인 97년 8월 30일 방송의 「오늘 밤 독점! 최강 생방송 「97메가 히트 라이브」(TBS계)까지 기다려야 한다.덧붙여 이 해는, 12월 22일 방송 「HEY!HEY!생 챔프 크리스마스·2시간의 생방송」(후지TV 계열)과 12월 26일 방송 「뮤직 스테이션 SP 슈퍼 라이브」97」(TV 아사히 계열)의 모두 스페셜 범위에서의 공동 출연뿐이다.
그 밖에도 많은 가수나 뮤지션이 그 자리에 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때의 첫 만남에서 교제로 발전하지 않았던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진흙탕 불륜이 특종되다
그런 첫 공연으로부터, 3년 후인 1999년 2월 5일.이날 발매되는 사진주간지 FRIDAY(1999년 2월 19일자)는 독점 특종 고백의 제목과 함께 이 같은 기사를 컬러 3개 면에 걸쳐 다뤘다.
6년간 함께 지낸 조강지처와 아들을 버리고 TERU(GLAY)가 오누키 아미(PUFFY)와의 불륜과 이혼을 털어놓았다.
12월 상순 어느 날.오후 9시가 지나자, 도내항구에 있는 산뜻한 맨션의 지하 주차장에서 한대의 풀스모크 자동차가 나타났다. 『GLAY』의 보컬리스트 TERU(27)의 애차다.10여 분 뒤 아파트 뒤편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절 주차장 안에 차를 세웠다.그 직후, 1대의 택시가 찾아와 정차.내린 것은 비니모를 쓴 여성 손에는 뭔가 커다란 숄더백과 TV아사히 로고가 새겨진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이어 차량은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해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사라졌다.〉
덧붙여 교제에 이른 경위에 대해서이지만, 교제가 시작된 것은 1998년의 봄무렵으로, 별거를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라고 한다.궁금한 그 계기가 된 이유에 대해 다른 주간지는 이렇게 쓴다.
〈두 사람의 만남은, 4년전,〉98년의 봄.음악방송에서 자주 만나 의기투합.이후 교제가 시작됐다.("여성 자신" 2002년 5월 21일호)
음악 프로그램에서 자주 만났다고는 하지만 1998년 봄에 GLAY와 PUFFY가 공동 출연한 TV 프로그램은 5월 27일 방송된 아빠 아빠 아빠 PUFFY(TV 아사히 계열)뿐이다.아마, 이 프로그램에서의 공동 출연이 계기가 되어 교제가 시작된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매주 수요일 23시 15분부터의 30분프로로, 게스트를 맞이해 밖을 돌아다니거나 게임으로 서로 경쟁하는 2부구성. PUFFY에 있어서 첫 방송 프로그램이다.(나중에 45분프로가 됨)
덧붙여서, 이 5월 27일 방송분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콩을 방문한 오누키 아미와 요시무라 유미가, 현지의 텔레비전 드라마 진출을 노린다.중국 사극 목계영에 출연하려는 두 사람은 PD와 직접 협상. 상대가 둘을 알고 있어 협상이 원활하다.또, 스튜디오에는 GLAY가 등장.멤버 내에서 모델 건이 유행하고 있다는 이들과 PUFFY가 사격 대결을. (더 텔레비전 1998년 5월 29일호)
「사적 대결」에서 의기 투합 한 TERU와 아미는 그대로 교제로 발전.처자를 가진 TERU는, 왕래 동거와 같은 생활에 돌입한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교제를 줄곧 숨기고 있었다.
이 관계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두 사람이 이상하리만큼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앞서 나온 FRIDAY는 지적한다.사실 그것은 철저한 것이었다.
〈만나는 장소에, 찻집이나 레스토랑은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절 경내나 주택가 아파트 주차장 모두 눈에 잘 띄지 않는 캄캄한 곳에서 순간적으로 합류하는 것이다.차를 타고 있을 때에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는 뒷좌석에 누워있어야 하고, 밖으로 투샷하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FRIDAY』 1999년 2월 19일호)
두 사람은 당대의 스타임에도 불구하고 으스스한 어둠의 절 경내에서 만나 아미는 차에 뛰어오르는 동시에 뒷좌석에 병자처럼 눕고 운전석의 TERU도 드라이브를 즐길 여유가 없으며 사랑의 보금자리라 할 아파트까지 급히 차를 몰는다.
2016년 NHK 고후방송국 소속 남녀 아나운서가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일을 저지르는 황당한 모습이 바로 FRIDAY에 보도돼 물의를 빚었지만, 분방한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천양지차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진짜였다.요즘 TERU가 취재진에게 말한 주요 내용을 정리해보면,
아미 엄마와 만나고 있다는 것
변호사를 내세워 이혼 얘기를 진행하고 있는 것.
'그것은 위자료 액수에 대해서도 포함되는 것'
게다가 불륜 상대인 아미에 대해서는,
"음악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데 있어 지금은 꼭 필요한 존재"
라고 단언하고 있다.
결혼을 향하여 기정사실이 만들어져 가다
아마츄어 시절부터의 팬으로, 아마, TERU 본인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해 왔을 것이다. 아내의 입장을 생각하면, 복잡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다.그리고, 여기서 소토보리에서 우치보리까지 메울 수 있도록, 결혼을 향해서 기정사실이 만들어져 간다.그래도 신중한 모습이 엿보인다.
다음 2000년, TERU는 아내와 이혼.그러나, 바로 오오누키 아미와 입적된 것은 아니고, 우선, TERU가 사는 도내 맨션의 다른 방에 아미와 아미의 모친이 이사하고 있다.2001년의 섣달 그믐날에는, 삿포로에서 행해진 GLAY의 섣달그믐 라이브에 아미가 동행.결혼은 초읽기로 여겨졌다.
그리고 2002년 4월 29일 각각의 홈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기록되었다.
음악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한 두 사람이기에 앞으로도 서로 자극하며 음악의 길을 걸어갈 겁니다.(TERU)
「여러분에게는 걱정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만, 자기 나름대로 숙고를 거듭한 결과이므로, 이해해 주시면 기쁘겠습니다」(오오누키 아미)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만난 지 6년 만에 결혼에 이른 것이다.
음악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한 둘이라서 조강지처를 버린 GLAY TERU의 결혼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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