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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드가에 돌아온 나는, 아레크씨에게 받은 쌀을, 곧장 조미와 정미를 하기로 했다. ……자력으로.

 

큰 병을 준비해서, 껍질이 있는 쌀을 그 안에 넣는다. 그리고 나무봉을 찔러넣어서, 안에 있는 쌀을 찌른다. 그것을 이제 계속 찌른다. 그러면, 차례대로 마찰에 의해 껍질이 벗겨져 기계와 같은것 처럼 정미가 가능 해 지는 것이다.

 

왜 이런 것을 알고 있는지, 내가 자라난 내력에 관계가 있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해안선을 낀 산간을 개척한 그 마을은, 에도시대에는 항구로서 번영되었지만, 시대가 지남과 함께 완전히 쇠퇴 되어 버렸다. 젋은 사람은 도시로 나가고, 지금에는 마을은 괴소기의 길을 착착 걷고있다.

 

그런 마을에 나는 4인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나의 조부는, 전쟁으로 남편과 장남을 잃어버리고, 남은 아이들을 여자 혼자 힘으로 키운 여장부였다. 운 좋게도, 나의 집에는 산도 밭도 논도 있었기 때문에, 먹는것에 곤란한 일은 없었지만, 전쟁 후, 아이들과 같이 산 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라고 손자인 나에게 말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용 할 수 있는건 사용하고, 만들 수 있는건 만들어라」를 모토로, 전후의 황폐했던 시대를 빠져나갔다. 그 모토는, 내가 태어나고부터도 가훈과 같이 인계되어, 우리 집의 식탁에 올라가는 야채나 쌀, 절임, 매실장아찌, 된장, 간장은 거의다 자가제(自家製)였다.

 

그리고, 그 그녀의 차남인 나의 아버지는, 장남이 빨리 타계하게 된 것에 의해 집을 잇게 되었다.

 

아버지는, 고교를 졸업한 직후에 공무원이 되어, 한 집을 지탱했다. 조모의 등을 보며 자라온 아버지는, 담배나 갬블 같은거에 돈을 사용하는 취미습관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지만, 그 반동인거 처럼 음식에 대해서는 이만저만아닌 집착을 갖고 있었다.

 

 

 

 

공무원으로서 일을 하면서 농업도 운영하고 있던 아버지는, 어딘가에서 신종 야채의 모종이나 씨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기르는 연구를 했다. 또, 그것을 가공 · 조리하는 방법에도 집착했다.

 

갑자기, 양계업을 한다고 말하고, 밭의 일부분을 스스로 닭장을 만들어서 닭을 기르기도 했다. 물론, 닭이 낳은 알도, 닭 자신도 우리 집의 식탁에 올라가게 되었다. 눈앞에서 닭이 잡히는 것을 볼때는 , 잠시동안은 고기를 먹을 수 없었지만, 그것도 한순간의 일이였다.

 

익숙해진건 대단해…….

 

나는 막내라는 것도 있어서, 조모나 아버지에게 특히 귀여움을 받은 탓인지, 여러 장소에 입회하게 되거나, 두명의 기술을 전수 받거나 했다 . 뭐, 어렸을때는 도우면 심부름값을 받을 수 있었다는 흑심도 있었지만.

 

그리고 우려했던 일에, 상경해서 단기대학에 입학 하기 까지, 나는 그런 가정환경이 보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야, 주변도 겸농업가 뿐이였고, 그게 아닌 집도 어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축산업을 하거나, 어느 집도 자급자족율이 도시보다 높았다. 또, 자기 집에서 만들지 못하는건, 물물교환이 당연했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의 현관 앞에서는, 항상 「저번에는 많이 받아서요~ 비록 조금이지만 ~ 이거이거 감사하게~ 오호호호호」같은 대화가 반복되기도 했었고.

 

덧붙여서, 엄마의 친가도 과수농업이였기 때문에, 친척도 다 비슷한 느낌이였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지금 하고있는 조미 방법은 아버지가 가르쳐주신거다. 집의 헛간에는, 옛날의 농기구도 있었지만, 현대 가정에서 조미를 하는건 이게 제일 쉽다고 실연해주었다.

 

옛날, 조모와 아버지에게 가르쳐 받은 것이나, 논밭에 끌려다닌 것은 그리운 추억이지만, 손은 부비부비 하고 계속 나무막대기로 쌀을 찌른다.

 

이렇게 말하는 내 취미라고 하면, 한결같이 먹으며 걷는것이였다. 신선한 재료에 둘러쌓여 자란 탓인지, 나는 맛잇는 것에 눈이없다.

 

사회인이 되어서 스스로 돈을 벌게 되었을때도, 열심히 한 자신에게 상이라고 한다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는 것이였다. 친구와 가거나, 동료와 가거나, 혼자라도 서슴치않고 갔었다. 일·미·중은 물론, 창작요리부터 다국적 요리, 양과자, 화제가 되고 있는 가게부터 숨겨진 유명한 가게까지 어디라도 다녔다.

 

물론, 매일 외식하고 있는건 아니다. 입사 2년째 평사원의 급료는 결코 많지 않다. 거기에, 혼자 살고 있기때문에, 자취하며 가계를 변통하지 않으면 안돼었다. 그러니까, 스스로 만드는 요리에도 구애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가에서 정기적으로 보내져 오는 신선한 야채나 어패류는, 가계의 도움에 되는것 뿐 아니라, 맛있는 식탁을 위해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였다.

 

브렌드를 매우 좋아하고, 자신을 갈고닦기 위해 돈을 쏟아 붙는 것 같은 여자가 보면, 있을 수 없는 일 일 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의 가치관은 각각 다르고, 맛있는 밥은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고 나는 믿고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도 맛있는 식사는 나에게는 필수불가결인 것이다.

 

계속 쌀을 막대기로 찌르는 단조로운 작업중에, 갑자기 원래 세계의 일을 떠올려서, 향수감에 빠졌다.

 

모두, 잘 지내고 있을까? 조부는 노망해지지는 않았을까. 아버지는 해가 지날때마다, 머리가 빠지고 있었지만, 아직 머리카락은 살아남아 있는 걸까. 어머니는 지금도 천연덕스러운걸까나. 결혼한 오빠, 언니는 부부관계가 원만하게 하고 있을까. 바로 위의 오빠는, 대학졸업한 뒤, 푸타로가 되어버렸지만, 취직처는 찾았을까. 무리였다면 집을 이어줘, 응.

 

뭐, 가족 모두, 밥은 맛있지 않지만, 저는 이세계에서 건강하게 있습니다.

 

숙연해 있지 않냐구? 아니, 이제 Home sick (향수병)에 걸릴 나이도 아니고. 나는 실종도 자살도 할 성격이 아니니까, 가족도 어딘가에서 내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할 터이다. 단지,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면, 한번 더 어머니의 요리를 마음껏 먹어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의 음식 사정을 생각하면 더욱…….

 

그래도 이루어 지지 않을 일은 어쩔수 없다. 지금은 그저, 빨리 하얀 밥을 먹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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